7~8 년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태양사신기'는 주몽이 청룡·백호·현무·주작 등 사신(四神)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는데, 이 때문에 사신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대중에게 무척 친숙해졌다.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호, 남방의 주작, 북방의 현무로 대표되는 사신 개념은 중국 고대의 오행사상 및 천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행사상은 우주 만물을 구성요소를 5가지로 압축해서 설명하는 이론으로, 5행이라는 것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를 말한다. 목은 청룡, 금은 백호, 수는 현무, 화는 주작과 연결된다. 토는 황룡과 연결되는데, 대표적인 고구려벽화고분인 강서대묘는 벽면에 묘사된 사신 이외에도 천정 중앙에 황룡이 묘사되어 완벽한 오행사상을 구현시키고 있다.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바로 강서대묘에 그려진 사신도를 모티브로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신도는 강서대묘 외에도 다른 고구려고분벽화에서 다수 존재하지만, 오행사상의 완벽한 구현 이외에도 예술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강서대묘는 고구려의 완숙한 정신세계와 문화예술 수준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역사성 못지 않게 예술성이란 큰 가치를 선사하고 있다.
치밀한 설계와 능숙한 시공, 세련된 돌 다루는 기술에 의해 이뤄진 석조 예술품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는 마을에 고구려 고분 3기가 모여있어 '삼묘리'라고 불린다. 고분군의 제일 남쪽이 강서대묘, 그 뒤 나란히 놓인 두 고분 가운데 서쪽이 강서중묘, 동쪽이 강서소묘이다. 때문에 이들 세 고분을 강서삼묘, 강서세무덤이라고도 부른다. 이중 7세기에 속하는 강서대묘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묘로 강서중묘와 함께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로 꼽힌다. 고구려 벽화 시기를 나눌 때 보통 3기에 속하는 고분 벽화다. 3기는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가 불안정해 동북아시아 패권국가와 문화중심으로서의 위상은 흔들리지만 예술적 완숙미는 최고조에 달한 시기다.
강서대묘의 봉토는 진흙과 석회를 번갈아 다져 방대형으로 쌓아 올렸고, 무덤칸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돌로 만들었는데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졌으며 방향은 남향이다. 3기 벽화고분들은 모두 구릉기슭에 남향으로 축조됐으며,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이른바 '명당'의 기본조건을 갖춘 곳에 위치했다. 무덤의 널길은 널방 남벽 중앙에 냈다.
널방 입구에는 두 짝 문을 달았던 문확 자리가 남아 있다. 널방의 평면은 정방형이고, 천정은 평행삼각고임식이다. 널길은 길이 약 3m, 폭 1.8m, 높이 1.7m이고, 널방은 남북 길이 3.18m, 동서 폭 3.15m, 높이 3.5m이다. 바닥에는 두 장의 잘 다듬은 판돌을 깔고 굽도리돌을 댔다. 그리고 정교하게 만든 화강암 판돌 관대 2개를 동서 양쪽에 나란히 놓았다.
널방의 벽면은 길죽한 판돌 두세 장을 수직으로 포개서 쌓되 윗부분은 안으로 기울어지게 다듬고, 여기에 맞추어 네 구석에는 5각형의 구석돌을 끼워 넣어 모를 죽였다. 또한 천정 각 단의 고임돌들 역시 휘임과 기울임을 주어 무덤칸 내 직선과 평면적 느낌을 덜고자 배려하였다. 이처럼 강서대묘는 당시로서는 치밀한 설계와 능숙한 시공, 세련된 돌 다루는 기술에 의해 이루어져 석조 예술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제3기 고구려고분벽화의 백미 '사신도'
강서대묘의 벽화는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는데, 앞선 시기의 벽화와 달리 안료제작상의 기술적 진보를 보여준다. 벽면에는 사신, 천정에는 연꽃무늬, 인동덩쿨무늬, 구름무늬, 산수, 기린, 봉황, 비어, 비천, 신선, 천인, 황룡 등을 배치했고, 붉은색, 검은색, 흰색, 초록색, 보라색, 노란색, 밤색 등 다양한 안료를 사용했다.
그림은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채색한 후 먹선으로 테두리를 치고 세부를 다듬어서 완성했다. 이를 철선묘법이라 한다. 화강석 위에 직접 그렸기 때문에 큰 손상이 없이 13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오히려 그 빛깔이 청명하게 살아남아 있다. 다만,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하여 손상돼 그림이 분명치 않다.
벽화의 배치를 자세히 알아보면, 널방에 들어서면 정벽인 북벽 중앙에는 북방을 상징하는 현무가 역동적인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북벽 좌우의 동벽과 서벽에는 관람자를 향해 질주해 오는 듯한 자세의 청룡과 백호가 매우 힘차고 생동감 있는 모습이다. 청룡은 푸른색, 녹색, 적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되어 신비감을 더해준다.
이름처럼 온 몸이 하얀 백호는 붉은 색의 날개와 혀로 인해 화면에 선명한 대비감을 일으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벽에는 중앙의 입구를 중심으로 양 벽에 그려진 한 쌍의 붉은 주작이 당장 날개를 퍼덕이고 날아오를 듯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묘사됐다. 이 사신도들은 배경 문양 없이 단독으로 그려져, 벽화의 주인공인 사신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매우 탁월하다.
하늘 세계를 상징하는 천정에는 선인, 천인, 서수, 꽃, 넝쿨무늬, 구름무늬, 별자리 등 다양한 소재들이 빽빽하게 장식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려한 색채와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준다. 이처럼 환상적인 천상 세계는 고구려인들의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된 결과물 이라고 할 수 있다. 선계의 중앙 즉 천정 중심부에는 황룡이 꿈틀거리며 무덤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중 현무도와 청룡도는 화려한 색채와 유려하면서도 힘찬 필선,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고구려는 물론 당시 동방 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한때 광활한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를 지배하였던 고구려인들의 진취적 기상과 그들의 찬란했던 문화적 수준을 짐작케 해준다.
1)청룡도
세련된 구성과 색채, 조형성이 가장 뛰어난 사신도로 사납고 용맹하며 속도감 있는 화면이 보는 사람을 압도케 한다. 용은 선사시대부터 고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숭앙되던 신화적 동물로 동방을 상징한다. 포효하는 듯 크게 벌린 입에서는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뻗쳐 나오고, S자형으로 흘러내린 목선과 몸통부분에는 푸른색, 녹색, 붉은색을 번갈아 채색했다.
그 위에 검은 망사무늬의 비늘을 묘사해 신비롭고 화려한 용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슴 양옆으로 꿈틀거리듯 붉은 색으로 묘사된 화염무늬 형태의 날개와 도약하려는 듯 크게 벌린 앞 다리의 자세에서 진취적이며 활달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고구려 청룡도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강서대묘의 대표적 작품이다.
2)백호도
호랑이는 청룡과 달리 실재하는 동물로, 그 용맹스러움으로 인해 원시시대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오행사상에서 서방을 상장하는 동물이다.
악귀를 쫓아내려는 듯 부리부리하게 치켜 뜬 눈과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크게 벌린 입에서 백호의 용맹성을 엿볼 수 있다.
S자형의 목선, 계단형으로 마무리된 꼬리, 앞 다리를 위 아래로 힘껏 벌린 자세는 청룡도와 매우 유사하다. 가슴부분에 묘사된 선명한 색채의 붉은 날개가 신수로서의 백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청룡도와 마찬가지로 유려하면서도 힘찬 필선을 보여준다.
3)주작도
남쪽 입구의 좌우벽에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주작도 청룡과 같은 상상의 동물이며 남방을 상징한다.
그 모습은 봉황과 흡사하다.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와 회오리치듯 말아 올린 꼬리의 강렬한 곡선, 온몸에서 불길처럼 뿜어 나오는 깃털, 붉은 색과 녹색의 기운이 감도는 화려한 모습은 불의 기운을 지닌 남방의 신수로서의 주작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주작의 발아래 묘사된 불그스레한 산악도는 화면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4)현무도
현무는 북방의 흑색을 뜻하는 현(玄)과 거북의 견고한 등껍데기를 상징하는 무(武)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북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이다. 고대의 신화전설에 의하면 거북은 수컷이 없어 잉태하려면 그들과 머리가 비슷하게 생긴 뱀과 짝을 지어야 하였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이들의 교묘한 엉킴은 투쟁이 아닌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북을 휘감은 뱀의 긴 타원형 곡선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북과 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화면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필선(筆善) 자체의 속도감보다 물상이 지닌 운동감과 생명력이 더 현저하게 부각되고 있는데, 그 윤곽선이 치밀한 톱니바퀴 모양(鋸齒形)의 파동을 이루는 점이 주목된다.
흑색의 선에 적(赤)·녹(綠)·황(黃)·청(靑)·백의 여러 가지 빛깔을 단색으로 사용했으나, 안료를 무엇으로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현무도는 거북의 안정감 있는 자세와 뱀의 탄력적인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고구려 최고의 현무도상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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