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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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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탕

옛날 평창읍 약수리에서 솟아나는 샘이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게 효험이 있어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 물에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이 길을 메우고 온통 혼란을 빚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때로는 문둥병 환자가 끼어 와서 이 물에 목욕을 하거나 먹으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아서 가기도 하니 이에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한꺼번에 들이 닥쳐서 이 마을은 문둥이 등살에 여간 혼란하지 않았으며 한 때는 밥을 빌어먹는 문둥이 때문에 주민들이 끼니마저 걸러야 할 처지에 놓여지기도 했다.
주민들이 약수 때문에 날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이 마을에 살고 있던 기운 센 장사가 절박해진 마을 형편을 알고는 큰 바위를 들어 약수탕을 덮어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간은 바위에 눌려 물이 흐르지 않더니 이후 묻어 놓은 바위 틈을 타고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이 물을 아무리 먹고 아무리 목욕을 해도 병에 아무 효력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장사가 바위로 약수를 덮은 후 약물이 다른 곳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지금은 약수가 없지만 옛날 약수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약수리로 부르며 지금도 옛날 약수가 나오던 곳을 약수터라 하며 맑고 깨끗한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다.


여미륵

평창읍에서 남으로 1km 정도 영월행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길 옆 우측 산비탈에 미륵불이 서 있는 것이 보이며 그 주위에 1m 정도의 돌담이 둘러쳐져 있다.
옛날, 여미륵이 마주 보는 강건너 종부리에 여러 대를 걸쳐 부유하게 살아 오던 황씨 일가가 있었다.
주인 황씨는 구두쇠로 유명하여 아무리 끈질긴 거지라 하더라도 이 황씨네 문 앞에서는 그냥 돌아가야만했었다.
어느 해 봄 백발의 노승 한 사람이 황씨 집을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다. 이에 황부자가 "원 별 미친 놈의 중을 다 보겠군, 내가 언제부터 덕으로 살았나?" 하며 한마디로 거절하자 노승은 황부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황부자님, 시주는 그만 두시고 소승이 지금 몹시 시장하오니 요기나 조금 시켜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은혜를 갚지 못하면 저 세상에서라도 황부자님의 극락왕생을 빌겠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뭐라고, 시주나 요기나 공짜로 주는 것은 매 한가지야. 밥 한덩이는 뭐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줄 알아?" 하며 화가난 황부자가 뒤안으로 돌아가 두엄 한 삽을 떠가지고 나오며 "이 염치없는 중놈아, 이거나 받아 가거라." 하며 노승에게 불쑥 내밀었다.

노승은 자비와 애긍이 뒤섞인 안색으로 황부자를 한참 바라 보다가 짊어진 바랑을 벗어 들어 사의를 표하며 이를 받아 넣었다. 두엄 한 삽을 받아 넣은 노승은 황부자집 문 앞을 말없이 돌아 서서 떠났고 처음부터 이같은 광경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황부자의 며느리 이씨는 죄스러운 마음과 아울러 태연히 떠나는 노승의 뒤를 쫒아갔다.
노승이 이미 강을 건너가자 며느리는 급히 뒤따라가서 노승에게 쌀을 시주하며 시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니 노승은 "부인 ! 괘념치 마시오. 본래 인간사란 모든 것이 헛된 것,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내 여기에 개념하겠습니까? 부인께서도 헛된 세상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나를 따라 나설 생각은 없소?" 하자 부인은 노승의 자비로움에 감화되어 선뜻 응락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스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대답하자 "갸륵하시오.
이것이 사바세계를 섭리하시는 부처님의 뜻이니 내 뒤를 바짝 따르시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하였다.

이씨부인이 노승의 뒤를 따라 얼마간을 걸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뇌성이 진동하고 번개불이 번쩍거렸다. 깜짝 놀란 부인이 순간적으로 노승의 말을 잊고 뒤를 돌아보니 수대를 이어 영화를 누려 오던 황부자집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서 시퍼런 물만이 출렁거리고 있기에 '앗!' 하고 놀라는 순간 부인은 그 자리에서 석불이 되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 이 석불은 당초에는 뒤를 돌아보는 상이었다는데 어떤 연유로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머리 부분이 파손되어 떨어져 나간 채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담

평창읍에는 많은 돌무지들이 있는데 이 돌무지들은 대부분이 임진왜란때 쳐들어 온 왜병과 관련된 전설을 갖고 있다. 임진왜란때 평창까지 쳐들어 온 왜병은 가는 곳마다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여만리에 있는 왜담은 당시 왜병을 막기 위해 우리 의병이 노성산성(魯城山城)에 방어진을 치고 대치하자 이를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할 때 주변의 돌을 주워다 진지로 구축하였던 담이라고 전해지는데 근래까지 형태가 남아 있었으나 1981년 제방 축조공사를 할 때 이 돌들을 날라다 썼다고 한다.
공사를 하던 중에 곳곳에서 부러진 창 끝과 화살촉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볼 수 없다.일명 '에담' '되담'으로도 불리워졌던 이 돌무지의 자리는 600여평이나 되었다고 한다.


장바위굴

임진왜란 때 왜병이 쳐들어오자 평창읍 주진리 부근 마을 주민들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아무 준비도 못한 채 마을에서 1km쯤 떨어진 천연동굴로 피난하였다. 피난한 주민들이 집에 있는 장 조차도 가져오지 못해 끼니를 잇지 못하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한 노파가 장을 가져오기 위해 몰래 마을을 내려갔다.
이 때 왜병들은 마을이 텅 빈채 사람의 그림자 조차 볼 수 없자 사방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숨어 내려오던 노파를 발견하고 칼을 갖다 대며 마을 사람들이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거듭한 끝에 결국은 숨은 굴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굴에 도달한 왜병들은 섶을 쌓아 불을 질러대니 동굴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일부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항복하였지만 일부지사와 병약자들은 동굴 안에 남은 채 타 죽고 말았다고 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이 동굴 속에서는 근래에도 사람의 것인 듯한 뼈 조각들이 발견되는가 하면 베틀이 발견되기도 했다하며 장을 가지러 갔다가 화를 입었다하여 이 동굴을 장바위굴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평창읍내에는 말등바위 전설, 용산정 전설 등이 임진왜란과 관련돠어 전해지고 있다.


절목&항물내기

옛날 마지 본마을 골짜기에 큰 절이 있어 골 이름을 절골이라 했는데 그 큰 절이 어느 때 부터인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깨어진 기왓장만이 남아 있다.
어느 날 이 절의 대사가 동자승을 데리고 이웃 영월땅으로 시주를 가던 중에 동자승이 몹시 목이 말라 주저앉자, 대사는 조금만 참고 산마루에 이르면 물이 있다고 달래어 갔으나 물이 보이지 않아 동자가 다시 물으니 대사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다 꽂고 염불을 외우자 그 자리에서 돌연 샘물이 솟아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는 지금도 물이 나오는데 작은 술잔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으며 부정한 사람이 마시려고 하면 물이 나오지 않거나 물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고목나무 4형제

옛날 옥황상제께서 인간 세상을 굽어보시다가 복을 받을만한 착한 마을이 있어 이 마을에 약수를 내리고, 마을을 지키고 보살피게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 4형제를 내려 보냈다. 그런데 마을을 두루 살펴보니 배와 같은 형국이므로 옥황상제는 아들 4형제에게 고목나무가 되어 배의 삿대 노릇을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큰 아들은 길가에 섰고, 둘째 아들은 한뱀이들에 섰으며, 셋째 아들은 안구렁이들에, 그리고 넷째 아들은 자지붕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섰다. 어느덧 세월이 흘려 겨우 한 인물이 나려 할 무렵에 삿대 노릇을 하던 4그루의 고목나무 중 2그루가 늙어 쓰려져 2개의 삿대가 없어지니 배가 제대로 움직여 나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어 이제까지 약수리에서 인물이 나오지 않고 마을의 발전이 더디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남평산&조판서묘지

평창과 방림, 대화를 경계로 하고 있는 하안미리 남병산(1149m)의 800고지에 조판서 묘지로 알려진 무덤이 있다.
조선시대 병조판서를 역임한 용인인 조판서가 죽자 묘지를 정하여야겠기에 지관에게 물으니 남병산에 묻어야 좋으며 그렇게 하면 50년 후에 그 산에서 은이 산출될 것이라 하였다. 맏아들이 그 위치를 알 수가 없어 북간도로부터 함경북도를 거쳐 강원도 금강산 등 사방을 헤매었으나 남병산을 찾을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대관령을 넘어 이곳 하안미리 사초거리에 와 여장을 풀고 일박을 하게 되었다.
이튿날 마을 청년 한 사람이 "야! 남병산에 나무하러 가자"고하는 소리를 들은 맏아들이 남병산이 이곳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아 내고 선친의 묘자리가 될 만한 곳을 찾아 보니 과연 명당으로 여겨지기에 유골을 경기도 용인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안치시켰더니 별 탈이 없이 집안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조판서의 묘지로 알려진 이 무덤은 사실은 종사랑을 지낸 맏아들 규완의 묘지이다.



도임상과 잣죽

평창에는 옛부터 잣나무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평창에 원님이 도임하면 도임상에는 반드시 잣죽이 나왔다고 한다. 가뜩이나 험지인데다 토산물이 별로 없는 작은 고을 원으로 임명된 것도 같은 관리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데 첫 도임상에 죽 그릇이 나왔으니 상을 대하고 앉은 원의 입장에서는 결코 달가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난 원은 이방을 불러 꾸짖곤 하였다.
"이봐라! 아무리 가난한 고을이기로 첫 도임상에 죽이 웬 말이냐? 들지 않을테니 상을 물리도록 해라."
원의 이같은 꾸중을 들은 이방이 말하기를 "저희들이 온 정성을 들여 만든 죽이오니 맛이나 좀 보시기를 아뢰오."
"죽을 만드는데 온 정성을 들였다? 그래 고을이 그리도 가난하더냐?"
"예! 가난하긴 하오나 어찌 사또의 세끼 진지야 거르겠습니까? 도임상에 죽을 드림은 저희 풍습이니 맛이나 보시고 상을 물리십시오." 하며 이방이 어서 드실 것을 권했다. 원은 마지 못해 수저를 들고조금 떠서 맛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음, 이게 무슨 죽인고?"
예 그것은 이곳 토산물로 만든 잣죽이옵니다." 드디어 원이 죽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 하는 말이 "이런 죽을 언제나 먹을 수 있느냐?"
예 그 죽은 도임하실 때만 맛을 보고 다시는 맛 볼 수 없는 것이 옵니다."
이처럼 평창군에 도임한 역대 원들이 첫 도임을 해서는 잣죽에 속지만 두고 두고 잣죽의 맛을 못잊고 그리워 했다는 얘기가 지금도 흥미롭게 전해지고 있다.


중서낭댕이약수

유동에서 조둔으로 가는 길목에 "중서낭댕이"라는 곳이 있는데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 하며 이절에서 서남쪽으로 50m쯤 되는 곳에 샘물이 흐르는데 이것이 약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 곳을 지나던 왜병이 절을 불태우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이 절에 있던 스님이 약수가 나오는 샘물을 반석으로 덮어 놓고 표연히 사라졌는데 이때부터 약수의 용출량이 줄어 들었으며 그 후 스님은 어느 곳에선가 왜병과 싸우다 죽었다 한다.
주민들은 지금도 조둔리로 들어가는 길목을 "중서낭댕이"라고 부르며 샘물을 덮었었다고 전해지는 반석이 지금도 있다.


용무리

옛날 평창읍 마지리에 가구 수가 3∼4호 정도일 때 이 곳에는 나주 나씨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이 집안에 사내아이가 태어 났는데 사흘 뒤 그 어머니가 산후 빨래를 갔다가 돌아와 보니 방 안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소리 및 병정소리가 들려 이상하게 여겨 방문을 열어 보니 병정들은 간 곳이 없고 방 안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 둔 솔가지가 와르르 무너지고, 아이가 보이지 않아 사방을 찾으니 어른 키 높이나 되는 선반 위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놀라 집안 어른들게 말씀 드렸더니 어른들이 놀라며 우리 집안에 장수가 났으니 우리 집안은 망하였다고 하면서 그 어린아이을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가족들이 멸문의 화를 막기 위해 어린 아이를 마당에 눕혀 놓고 그 위에 떡안반을 올려 놓아도 죽지를 않자 팥 석 섬을 더 올려 놓아 눌러 죽었다. 그 뒤 3일이 지나자 맑고 구름 한 점 없던 날씨가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 오면서 천둥 번개가 치더니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한나절 가량 쏟아지던 비가 멎다 마지리에서 응암리로 가는 길(부락에서 100m 정도)들판에서 커다란 말 울음소리가 들려 가 보았더니 용마 한 마리와 커다란 못이 생겨있었다. 사람들이 말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사납기 이를데 없어 잡지 못하였고 주인을 잃은 말이 사흘 동안 진도(마지 1리 1반)에서부터 시동(마지2리)까지 오르내리며 울부짖어 밤이면 무서워 밖을 나다닐 수 없었다.

이렇게 울부짖던 말이 시동에서 죽은 채 발견되니 사람들이 시체를 거두어 말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의 마지라는 이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면 사람들은 용마가 태어난 이 못을『용물이』라고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영무리로 되었고 지금은 용물이라고 부른다. 이와 비슷한 전설은 미탄면 기화리 용수골, 방림면 방림 4리 용소(용바위소), 용평면 영전리, 도암면 용산리 등 평창군내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옻물

옛날 평창읍 후평리에 어여쁜 처녀가 있었다. 어느날 처녀가 밥을 지으면서 옻나무로 불을 지폈는데 옻이 그만 온 몸에 퍼져 며칠을 두고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하루는 백발노인이 찾아와 시루묵을 바라보는 산 기슭을 가리키며 "저기 저 작은 골짜기에 가면 처녀의 몸을 낫게 할 샘물이 있을 것이니 그 샘물을 마시고 바르면 나을 것이오"하고는 표연히 수염을 날리며 걸어갔다.
이 말을 들은 처녀는 즉시 산 기슭에 올라 샘물을 몸에 바르고 마셨다. 이 삼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샘물을 마시고 바르며 몸을 씻어내자 효험이 나타나 처녀의 몸은 깨끗이 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후평리에는 그 때의 샘물이 남아 있고 사철 솟아 오르며 어쩌다 옻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이 샘물을 찾아 마시고 씻어서 낫는다고 한다.


[미탄면]

장자터

옛날 미탄면 회동리에 많은 재산을 가진 장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시주를 오자 시주 대신에 거름을 바랑에 넣어 준 채 쫓아 내자 이를 뒤에서 지켜 보고 있던 이 집 종이 장자 몰래 광의 쌀을 꺼내 따라가 스님께 시주를 하였다.
시주를 받은 스님이 종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빌면서 아무 날에 얼른 집에서 나오라고 일러주며 총총히 사라졌다. 이 말을 들은 종이 그 날 집에서 나와 뒤를 보니 어느새 집에 불이 나 그 많은 재산을 지녔던 장자가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됐다고 한다. 이같은 장자터 전설은 평창읍 천동리, 방림면 계촌리 등 군내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있다. 미탄 장자터 옆의 바위 벽은 주민들에 의하면 지금도 불에 타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며 그 자리에서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다.



다시 태어난 노인

지금 대개 인생환도 한다고 그러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고 그러지. 그게 곧이 믿기질 않어. 그게 누구던지, 누구던지 그게 믿기질 않어. 그래, 수청리 어떤 집안에서 오래살던 나이 많은 노인이 돌아 가셨는데 그 노인이 어디가서 태어났다고 하니 경상도 어디 가서 두시 반에 태어났어. 태어났다는데 그 애기가 그 경상도 집안에 태어날 적에 등허리에다가 말이지. 주소 성명을 가지고 태어났어. 그래서 그 분네가 여와서 그런 집안이 있나 하고 문의까지 한 일이 있어. 그런 일두 있어.


도깨비가 되는 빗자루

그거 모르는 사람들이 많어. 거 밤에 가다가 뭐 저기 홀린 사람 많아요. 그런데 그 어떤 노인이 여기 와서 술 잡수고 새벽에 거거 내려 가다, 뒤에 꼭 같은 각시가 앉아서 있어. 근데 그 전에 그런 일 있었지. 그 노인이 그래서 거기 가다가 참 젊은 새댁이 말이야. “아 할아버지 나좀 데려가줘.”

같이 가자고 그러께, 그 이양반이 지각이 있는 분이라 그래고 “오라고 내 등에 업히라.”고. “아가씨가 어떻게 걸어 갈 수 있느냐고.” 그래 들어 업히더래. 그래 이놈이 바짝 지고 말이지 집에 까지 갔다는 거여. 집에까지 가는데 집에까지 가서 큰기침을 하고 너 빨리 일어나서 마당 함덕불되게 해 놓으라고 그래 나와서 불, 마당에 장작불 피우라고. 그래 불을 피우고 보니 저쪽으로 보니 달각 소리가 난다 말이여. 달가 소리가 나니깐 “야 너희들 내 등허리에 뭐이좀 있나 봐라.” 그러니 며느리, 아버지, 손녀들 헤아지고 “할아버지 등허리에 뭔 빗자루를 꽂고 왔어요.” 그러더래. 그래 빗자루가 도깨비가 된다는 이말이지. 그런 얘기도 있어요.


호환이야기

그런 것도 있고, 뭐, 도깨비를 보질 않았으니까는 그런 거 같고 도깨비 굴이라고 하고 그랬지 뭐. 뭐, 뭐, 도깨비 굴이 도깨비가 어디 있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런 얘기만 듣고 그랬지 뭐. 호랑이라는 것도 우리 나이는 보지도 못했으니 뭐, 호랑이가 있는지 없는지. 그란데 그전에 여이 본 사람들이 있거든. 호랑이가 사람을 끌구 가서 먹구 잡 먹구서는 뭐, 그랬단 얘기도 있는데 그건 뭐, 몇 백년 전인지 뭐, 몇 백년인지 그래가지고, 여 강가에 들어가면은 거기 갔다가 이제 사람 물어다가 이제 잡아먹고 그랬단 그런 얘기도 있지 있는데, 그 얘기도 뭐, 우리도 들은 얘기지, 그런가보다 하고 여 여 차 타고 온 사람 남자 있잖아 정희준이라고 지금 그 사람들 집인데, 거게 인제, 그 집에 살던 사람이 호랑이 물려 가 가지고서는 그 집에 강가에 거기 가면은 이제 으쓱한대 있어


수절과부 열녀비

그에 서로 약혼을 해놓고 옛날에 약혼하고 돌아가시니 어떡해. 그래도 약혼을 해놨으니까 옛날에 이젠 시집 장가를 가도 서로 못 만나보자네? 사주그름 해 놔 돌아가니 그래도 사주그리 했으니깐 그 집에 들어가서 통보를 했어. 통보를 하니까 왔어. 백가매, 백가매 타구서믄 와 가지고 우리 집에서 그냥 돌아가셨다구.
그러니까 신랑이 죽었는데 약혼식만 해놨지, 옛날에 돌아가시니 백가마를 타고 와서 늑달만에 돌아가셨다구 도로. 그래서 사람들은 합장시키라고. 그걸 몰랐다고, 내가 몰랐다고, 나도 모르고. 참, 그 열녀비를 했어야 했다고. 지금 저 앞에 비석이 있어요. 그럼 총각색시 서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아, 죽었다고 백가마 타고 왔으니 늑만넉에 돌아갔어. 그래 내가 비 써서, 열녀라고 비 써서, 셋째조 할머니래요.


백골이 유래

옛날에 듣기로는 뭐, 지도상에는 뚜렷히 나오는 것도 없고, 옛날에 여기서 맡은 백골이라는 지명이라는게 여기 부근리 안으로 골이 백골이 있어서 그렇게 많이 전해져. 나도 옛날 사람은 아니요 옛날 사람은 다 죽었고 죽은지 10년 되요 옛날 그분들이 어른들 시대부터 살고 나두 어른들 시대부터 난 사람이요.



백운리의 유래

백운리라는게 고을이저기부터 고을이 지따랗게 되어있단말이요, 지따랗게 되어가지고 백운이라고해 지금 말을 하자면 배처럼 생겼다 말이예요. 배처럼 생겨서 옛날부터 백운이라고해. 아, 그니까 부락으로 내려가면 우리가 친구들이 막 무어가지고 얘기하면 너는 꼭대기에 앉아있고, 나는 위에 있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지 말이야 나배 위앞에 살지 너는 뒤에산다. 그랬다구요. 여가 앞이지 뒤는 아니란 말이여 여가 구도로 길이 돌아서 나왔거든.


말이 날아간 명당

저, 근데 그것은 뭐, 그렇게 뭐, 명당은 아닌데, 저 한골이라느데 음, 이제 산이름이 말대가인데 거다가 묘를 썼는데 어떻게 묘를 겁나 보이는 데 파가지고 파니까 뭐 저거 까투리 세마리가 날아가고 해가지고 , 해를 봤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피해를 봤다고. 그 산이름이 이제 말대가리 산인데 , 근데 그것을 그냥 인제 재산피해가 되었다고 집안이.


역촌의 유래

옛날 역사라는 것이 고거 역사라는 것이 많은 지역이 어떠나 이르면 여러분들이 델레비를 들어봐야 알지만 그건 왕도 시절에 왕, 군수 많이 살던 주변에 가야지 옜날이 이야기가 있지. 여기는 전부 전설 옛날에 그 쪽골로 다니지 이쪽골로 안다녔지 이말이야. 말타고 가마타고 저쪽으로 다녔었지. 정선군 지역에 역선이 있고 평창군 지역에 가면 역선이 있지.
그 주위에 가다랗는 데는 역선이 없다 말이여 정 말하지면 가마를 타고다니는 사람, 그 지역이 있다 말이야. 그 지역이 피안이라는게 있고 용골이라는것이 있는데 옛날에 역촌이라는데가 있었다고 피안역촌이락 하고, 정선 역촌이락 하지. 역촌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낮은 사람이람 말이여. 가마 메고 다닌 사람이 지금말로 하지만 군수도 가마 해주는 사람이 해주지 역촌이라는 지역에 있는 사람이 지금말로 하자면 가마는 상놈이 하는거여.

[방림면]

불효자와 폐현

방림면 계촌리는 산골이면서도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곳인데 이 곳에는 지금도 향교터, 향교골, 옥터암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옛날 이 지역에는 縣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이 곳에 살고 있던 한 할머니가 손자를 등에 업고 간장을 달이다가 그만 끓는 장물 속에 손자가 떨어져 죽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집에 돌아와, 자기 아들을 간장 속에 빠뜨려 죽였으니 어머니도 같이 죽어야 한다면서 자기 어머니까지 간장솥에 집어 넣어 죽이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그 불효자를 거리에 내어 찢어 죽이고 불효자가 난 곳이라하여 현을 폐하였다고 하는 말이 전하고 있다.


호랑바위

옛날 평창 향교가 남산정 자리에 있었을 때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제삿날이면 어떻게 된 까닭인지 꼭 호랑이가 나타나 처녀를 물어가곤하여 모두 향교 자리가 좋지 않다고 여겨 향교를 헐어다 지금의 하3리 산기슭 아래에다가 옮겨 지었다고 한다. 그런 뒤로 아무런 변고가 없었는데 3년이 지나자 뒷산 중턱 바위 위에 죽은 처녀들의 갑사댕기와 머리카락들이 흩어져 있어 이를 주워다 호랑이의 소행을 하늘에 고하고 처녀의 넋을 빌어 주자 이후 다시는 처녀가 잡아먹힌 일이 없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 바위를 호랑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여우재

옛날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가는 과객이나 장사치들이 방림면을 동서로 갈라 놓은 태기산의 지맥인 한 재를 넘노라면 백발노인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길가는 행인을 괴롭히곤 하였다.
이러던 어느 겨울날에 기골이 장대한 젊은 장정 한 사람이 이 고갯길을 넘는데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흰 두루마기를 입은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 막고 나섰다.
젊은이의 눈에는 두루마기 속에 감춰진 여우의 꼬리가 보였고 이에 젊은이가 단숨에 주먹으로 노인을 때려 눕히고 나니 죽은 시체는 머리로부터 서서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꼬리까지 완전히 여우의 모습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후부터 이 재를 여우재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용바위 전설

저 산에서 인제 장수가 참 옛날에 났는데 팥을 세 가마니 눌러 놨대요. 역적이 낳다고. 그래 죽었는데, 산에 묻었는지 하여튼 거기서 하인이 지나가다가, 참 자리를 못쓰고 있었대요. “자리는 참 좋은데, 참참.” 이러드래. 못 쓰고서 놔둔 분이 말을 잘 안 하려고 하더래. 여기 엎드려 가지고서는, 오래 엎드려서는 아무리 무섭고 그래도 고개를 들지 마라 이랬대요. 그런데 고만 무서우니깐 고개를 들었다는 거야. 장수 난 곳에서, 해서 묘인지 해서 학이 날아 가더래요. 학이 날아가서 장전이라는 곳 있잖아요 걸로 날아가고, 또 용바우는 말발자국이 또 있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도깨비에게 홀린 이야기

어머니는 11살 먹어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7살 먹어 돌아가시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용바위가, 방앗간이 있었는데 거기 갔다오다가 방아 찧어 갔다오다가 쌀을 찧어 한가마니 지고 홀려 가지고, 도깨비한테 홀린가 봐요. 그래 가지고 저 산을 다 헤매가지고선 날이 샜는데, 새벽여물 끓이는데, 불이 훤하고 대내에서 부엌에서 불을 떼니 불이 환하게 비춰 가지고 불을 보고 내려왔대요. 앓다가 8월 달에 돌아가셨어요.


도깨비 물장난하는 이야기

어머니는 11살 먹어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7살 먹어 돌아가시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용바위가, 방앗간이 있었는데 거기 갔다오다가 방아 찧어 갔다오다가 쌀을 찧어 한가마니 지고 홀려 가지고, 도깨비한테 홀린 가봐요. 그래 가지고 저 산을 다 헤매가지고선 날이 샜는데, 새벽여물 끓이는데, 불이 훤하고 대내에서 부엌에서 불을 떼니 불이 환하게 비춰 가지고 불을 보고 내려왔대요. 앓다가 8월 달에 돌아가셨어요.


버섯봉의 유래

그런데 이기 앞으로는 안보이지만 이산 능선 따라서 넘어로 가면은 바우가 쭉쭉나간 기 버섯 같아요.
밭가는 보그래 있잖아요. 보습처럼 뾰족뾰족하거든요. 그걸 따가지고 버섯봉이잖아요 허허. 요 안이 전체가 방축골이잖아요. 방축골인데 요 안에서부터 1개 반인데 집들이 많이 헐리고 요 안에 가면은 집이 세 집밖에 없어요. 이리 죽 가시면 후동 뒷골이라는 덴데 24호가 살았는데, 도에서 원종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집이 싹 뜯기고, 그러는 바람에 짐승이 많아요. 여느 짐승은 많아요. 호랑이는 시방 없지만.


청수골의 유래

그 옛날에, 머 저 고을이 들면 고을이라고 그래, 고을이 옛날엔 원이잖아요. 원이 있으면 창을 갖다 두는 데가 있다대요. 창수동이라고 옛날 어른들이 그러더라구만. 계촌 3리 가면 거 옛날에 향교 터라고 그러는데, 지금도 향교 터라고 써놨죠. 향교가 거(거기)있었다구(해서)향교 터이고, 여긴 창 터다, 창 터가 여(여기) 있어서 창동이라고 그래요.


덕수바우와 버섯봉

전설에 보면 덕수라는 분이 석이버섯을 따다가 떨어져서 사망돼서 덕수바우라고 전설을 붙인가 보더라구요. 하방림 내려가다보면은 버섯봉이라고 있죠. 버섯봉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밭가는 버섯처럼 생겼기 때문에 바우가 버섯봉이라고 해요.


도꾸(도끼)소

여 올라가면 도꾸소라는 소가 있고, 소가 이젠 다 매켜(막혀) 가지고 다리 놓아 깊지 않아요. 전설에 도꾸소라 그러는데 벼랑에서 나무 베다가 저기 이렇게, 옛날에 도꾸로 나무 베었잖아요. 도끼로 나무 베다가 도끼가 소로 뚝 떨어진가봐. 그렇게 전설을 부르더라구요.


[대화면]

강감찬과 우물

지금으로부터 900여년 전 고려 초 당대의 명장인 강감찬장군이 강릉에서 원주로 한여름에 행군중 대화면 하안미를 지날 때였다. 이 일대는 늘 물이 귀하여 봄 가을에는 식수로 고생을 했는데 마침 강감찬장군이 목이 말라 물을 긷는 아낙네에게 다가가서 물을 청했으나 아낙네가 인심이 고약하여 물이 없다고 거절하자 장군이 이를 괘씸하게 여겨 이 마을에는 다시는 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부적을 한 장 써 붙이고 갔다.

그 후부터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하는데 요즈음도 아무리 우물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한발이 조금만 있어도 강바닥이 마르기 일쑤이며 하안미에 사는 사람들은 그 때의 인심으로 지금도 놀림을 당하고 있다.


도둑바위

대화면 대화 5리를 지나 반정교에서 왼편으로 들어서는 몰이골이라는 골짜기가 있으며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금륜산 능선에는 1km 가량의 거리를 두고 모양이 거의 비슷한 높이 40m 가량의 고개에 기이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두 바위를 가리켜 암수 도둑바위라고 부른다.

그 까닭은 옛부터 이 두 개의 바위너머로부터 도적이 자주 나타나 몰이골 부락민을 괴롭히고 또한 화재가 자주 발생하므로 도둑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금륜산 기슭에 대덕사가 세워지자 이 사찰의 명칭에 따라 두 개의 바위를 암수 대덕바위로 고쳐 부른 후부터는 흉사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메밀꽃과 호랑이

평창이 낳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대화 봉평을 소재로 한 것으로도 너무도 유명한 소설이다. 달밤에 핀 메밀꽃을 보고 하도 하얘서 어떤 사람은 이를 냇물로 알고 바짓가랑이를 걷고 지나갔다는 말이 있다.
먼 옛날 산중에 홀어머니가 오누이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어머니는 장을 보러 가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고 말았다.
두 남매까지 탐이난 호랑이는 어머니 처럼 차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얘들아 문열어라. 엄마다"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호랑이의 목소리였기에 오누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손을 내밀어 보라고 했다. 오누이가 손의 털을 보고 엄마가 아니라고 하자 호랑이는 가시밭에 갔다 왔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이에 속아 오누이가 문을 열어 주었더니 들어 온 것은 엄마가 아니고 호랑이였다. 호랑이를 보고 겁에 질린 누나는 소변보러 간다고 밖으로 나가고 동생은 물먹으러 간다고 나가서 뒤곁 울안 우물가의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기다리다 지친 호랑이가오누이를 찾아 나왔다가 우물 속에 비친 오누이를 발견하고 물 속의 그림자를 잡으려 하자 오누이는 나무 위에서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나무 위의 오누이를 발견한 호랑이가 오누이를 쳐다 보며 묻기를 "어떻게 올라갔니?"하자 꾀 많은 누나가 "기름 바르고 올라왔다"고 했다. 이 말을 믿은 호랑이가 기름을 바르고 올라가려고 했으나 계속 나무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기만 했다. 그 꼴이 하도 우스워서 동생이 무심결에 "도끼로 찍으면 쉽게 올라오지"하자 호랑이는 도끼로 나무를 찍으면서 금방 오누이가 가까이까지 올 수 있었다.
급해진 오누이가 하느님께 대고 "하느님 우리를 살리시려거든 새 두레박을 내려 주시고 죽이시려면 헌 두레박을 내려 주세요"하고 빌자 하늘에서 새 두레박이 내려 와서 남매를 태우고 올라갔다. 이것을 본 호랑이도 흉내를 내어 오누이와 같이 기도를 하자 역시 하늘에서 큰 두레박이 내려 왔다. 그러나 호랑이가 탄 두레박은 헌 두레박이었으므로 이것을 모르고 탄 호랑이는 도중에 메밀밭에 떨어져 죽었다 한다.그 때 호랑이가 메밀밭에 떨어져 죽은 피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메밀꽃 줄기가 붉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조와 문수동자

조선 제 7대 세조(수양대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로서 1425년 문종이 승하하고 왕위가 어린 조카 단종에게 돌아가자 측근인 한명회 권남 등의 권유에 의하여 1455년 마침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 낸 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단종의 복위운동을 했다하여 성삼문 등 사육신을 무참하게 죽이고 영월 청령포에 유배됐던 단종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비인간적인 행동은 세인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왕권강화와 학문 장려 등의 정책을 펴 나갔지만 어린 조카와 많은 신하들을 죽인 것으로 인하여 항상 불안감과 죄의식속에서 생활하였다.
어느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이며 문종의 아내되는형수가 나타나서 세조를 호되게 꾸짖다가 "에이 못된 것! 어린 조카를 죽이다니! 조카의 자리가 그렇게도 탐이 났더냐 "에이! 더러워라"하면서 세조의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그 후 세조는 꿈 속에서 침에 맞은 곳에 종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온 몸에 퍼져서 결국은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고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보고 각지의 온천과 약수를 찾아 다녀보았으나 효과를 볼 수 없었던 차에 마침내 오대산 상원사를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면서 병치료와 속죄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세조가 상원사에서 500m쯤 떨어진 관대거리에 나가 관대와 띠를 풀고 맑은 계곡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는데 아무리 씻어도 가려움증이 가시자 않아 길가에 한 소필승(동자)이 나타나기에 "얘 너 이리 와 내 등을 좀 밀어 줄 수 있겠니?"하니 사마승이 "예 그러지요."하고 대답을 한 후 한참 등을 밀어주자 가려움증이 씻은 듯이 가시며 몸이 날 것만 같아졌다. 목욕을 끝낸 후 세조가 "참 그놈 기특하다만 어디 가든지 임금의 등을 밀어 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하자 사마승이 "예. 그러나 대왕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문수동자가 와서 등을 밀어주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하고는 몇 걸음 걷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부터 몸의 병이 점차 씻은 듯이 낫자 세조는 동자를 찾기 위해 상원사 뿐 아니라 오대산 전 암자를 뒤졌지만 끝내 그 동자를 찾을 수 없었다.
세조는 그제서야 자기의 병이 나은게 약효나 우연이 아니라 오직 부처님의 힘인 것을 알고 등을 밀어준 사미승이 다름이 아닌 문수동자의 화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즉시 이름난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보았던 문수동자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두 번을 그려도 모양이 같지 않더니 세 번째에 가셔야 겨우 자신이 본문수동자와 비슷하였다. 이렇게 그려진 문수동자상은 상원사에 받들어모시고 강릉 신석평 7백석지기를 하사하여 문수동자상에 매일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고 하는데 지금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고 본당의 오른쪽에 목각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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